삿포로에서의 두번째 아침이 밝았다. 창 밖에 슬쩍 보이는 풍경은 구름 가득한 회색빛이다. 햇빛이 없으니 돌아다니기에는 편하겠거니 싶으면서도 어제의 쌀쌀했던 날씨가 생각나 긴 옷을 바리바리 꺼내 챙겨입고 머플러도 가방에 넣었다. 오늘 아침은 방문지는 니조시장(二条市場). 삿포로의 명물이기도 하다. 시장의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북해도의 명물인 털게를 비롯한 각종 싱싱한 해산물을 볼 수 있고, 그 싱싱한 해산물이 듬뿍 올려진 카이센동(海鮮丼, 해산물덮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
체크아웃 후 시내구경을 위해 로비에 짐을 잠시 맡겨두고 호텔을 나섰다. 방에서는 그저 흐리게만 보였건만, 막상 나와보니 촉촉한 공기 속 가늘은 빗줄기가 내리고 있었다. 방에서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가늘은 빗줄기는 돌아다니기에는 부담이 없을 정도였지만, 우산을 쓰지 않고 다니기에는 옷이 젖을 것 같았다. 혹시나해서 챙긴 우산이 하나 뿐이라, 숙소 맞은편 편의점에 들러 비닐 우산을 하나 더 사고, 무인양품의 감성이라며 기념사진을 남겨봤다. 유니클로 체크무늬 셔츠까지 입은 남편은 영락 없는 니혼진데쓰네 ㅋ
거리마다 정장 차림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을 보며 휴가 중인 관광객 신분임을 새삼 실감했다. 이 곳에서는 가늘게 흩뿌리는 비가 익숙한 모양인지 우산 없이 비옷을 걸친 사람도 많았고, 핸들 쪽 어딘가에 큰 우산을 단단히 고정해둔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도 있었다. 분주한 듯 조용한 아침 풍경을 둘러보며 15분 정도를 걸어 니조시장에 도착했다.
즉석에서 구워주는 가리비구이의 향이 고소하다.
이른 시간에 비까지 온 탓인지 손님도 많지 않았고, 시장 내 가게들은 절반도 오픈하지 않은 상태였다. 시장이 크지 않아 전체를 한 번 돌아보는데 2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열려있는 가게 몇 군데를 둘러본 뒤, 식사를 위해 오이소(OHISO)로 이동했다. 여느 일본식당이 그러하듯 문이 열리자마자 씩씩한 목소리의 이랏샤이마세가 들리고, 다다미가 깔린 안쪽 자리로 안내를 받았다. 테이블 옆에 끼워둔 커다란 메뉴판은 종이에 사진과 가격, 재료가 인쇄되어 코팅된 형태로 되어있다.
밥은 2가지 크기로 고를 수 있는데, 실제 그릇을 가져와서 크기를 보여준다. 해산물이 올라가있어 양이 보통이라면 작은 크기를 해도 크게 모자람이 없다는 설명을 미리 보고 온 터라 사이즈는 작은 것으로 골랐다. 가격은 해산물의 종류나 크기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나는데 평균 2천-3천엔 정도였고, 내 기억에서 가장 비쌌던 메뉴가 우니만 올라가 있는 덮밥으로 5천엔에 육박하는 가격이었다. 해산물 토핑 조합이 다양하고 원하는 메뉴도 추가할 수 있지만 가격대가 있다보니 식탐 많은 (나 같은) 먹보는 메뉴를 고르는 것도 쉽지 않다. 고민 끝에 나는 털게, 연어, 우니가 올라간 메뉴를, 남편은 2가지(참치+우니, 우니+연어+연어알)로 주문했다.
조심스레 우니를 떼어 입 속에 넣자, 입 안 가득 고소함이 퍼진다. 서울에서 이 가격으로 이렇게 싱싱한 우니와 연어, 게살을 먹기는 쉽지 않다. 다음에 또 오게 된다면, 그 때는 우니만 듬뿍 올라가 있는 메뉴를 주문해서 먹어봐야겠다고 다짐하며 정신 없이 수저를 움직인다. 밑에 깔린 밥은 일본 특유의 달큰한 간이 약하게 배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간이 없고, 밥 양도 조금만 더 있으면 더 좋았으련만 싶었다. 아침공복에 달큰한 간장과 날 것의 해산물이 들어가서 그런지 양적인 아쉬움에 비해 더 먹히는 느낌이 없어, 큰 사이즈를 시키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 먹고 시장을 한 번 더 둘러보며 조그만 통에 한 입 크기로 썰어서 파는 유바리 멜론을 사서 먹었는데, 이게 정말 맛있었다. 순식간에 흡입해서 사진 한장 남지 않았지만, 훗카이도 가면 반드시, 무조건 유바리 멜론을 먹어야 한다. 가격은 3천엔. 참고로 시원할 수록 더 달고 맛있다. 이 맛을 잊지 못하고 이후 여행 내내 멜론을 찾아헤매게 됨.
아침을 먹고 다시 삿포로 시내 이 곳 저 곳을 둘러보았다.
때 마침 백화점 근처라 구경을 해보자며 갔다. 본의 아니게 개장시간(오전 10시반) 전에 도착해서 앞 벤치에서 한량마냥 대기하다 입장.
잠도 깰 겸 백화점 1층 스타벅스에 들러 커피 한잔하고. 놀랍게도 일본은 아이스 short사이즈를 판다. 한국도 도입해줘요~~
삿포로 미츠코시 백화점(三越百和店)의 외관. 가본 적도 없는 곳인데 귀에 익은 이름이라 네이버를 찾아봤더니, 우리나라에 생긴 최초의 백화점이 바로 경성 미츠코시 백화점이라고. 영화 <암살>에서 미츠코-안옥윤 쌍둥이 자매(전지현)가 서로 만난 장소로도 나오던 바로 그 곳. 주변의 다른 백화점들이 젊은 고객들을 대상으로 한다면, 여기는 다소 연배(와 돈이) 있는 고객을 대상으로 한 느낌. 다른 백화점들에 없는 고급 브랜드 대다수가 입점해있다. 명동신세계 본관 느낌이랄까. 다만 외관이나 입점브랜드에 비해 내부 인테리어며 디스플레이가 80-90년대에서 시간이 멈춰버린 느낌이라 약간 당황스러웠다. 삿포로 시내가 80년대 후반~90년대의 서울 같다고는 생각했는데, 백화점마저 이럴 줄이야. 패션이니 유행이니 그런 걸 잘 알지 못하는 내 눈에도 옷이나 몇몇 가방 빼고는 21세기의 느낌은 눈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서울 강남 백화점 디스플레이가 너무 세련된 탓일 수도 있겠지만, 빈티지도 아니고 그냥 올드한 분위기. 에스컬레이터가 닫는 층층마다 과도하게 친절한 인사를 하는 직원들이 아니었다면 영락 없는 아울렛 분위기다. 친구가 이야기했던 매장이 있어 가 봤는데, 밖에서 대충봐도 너무 볼 게 없어서 들어가보지도 않고 지나왔다. 일본에 쇼핑을 목적으로 온 거면 북해도는 안 가는 게 나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은 백화점 투어였다. 인상적이었던 점은 한국과 달리 젊은 직원 위주가 아닌, 다양한 연령대의 직원들이 고루 일하고 있었다는 점.
다시 시내를 지나, 훗카이도청 구 본청사로 향했다. 1888년, 미국 네오바르크 건축양식의 건물로 메릴랜드 주 의사당과 메사추세츠 주 의사당을 본뜬 곳이라고 한다. (여행책자 참고) 현재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으며, 자유롭게 입장이 가능하다.
내부는 당시의 조명이며 벽의 형태를 비교적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다.
100년이 넘은 건물답게 바닥을 걸을 때마다 오래된 나무바닥 특유의 삐걱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현재는 박물관으로만 이용되고 있다. 몇몇 방은 건물의 역사를 설명한 그림 등이 전시되어있거나, 역대도지사(?)의 사진이 걸려있기도 하고, 건물이 이용되던 당시의 시설을 재현해둔 관 같은 것으로 만들어져있다.
장미 같은 솔방울.
앞이 시끌시끌하길래 나오면서 봤더니 만담 및 마술쇼 분위기. 무슨 말인지는 하나도 못 알아듣겠는데 듣는 사람들 모두 웃고 있다.....
귀여운 픽토그램.
마지막 삿포로 시내 투어로 삿포로의 상징이라는 시계탑 도케이다이를 보러 갔으나 공사중............................
그렇게 안내판만 보고 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무계획 삿포로 시내 투어가 끝났다.
오늘 오후는 삿포로에서 기차로 1시간 반 정도 거리의 토마무로 이동하는 일정이었다. 삿포로역으로 가기 전 일본라멘집을 들렀다. 구글맵에서 평가가 좋아서 찾았던 이치류안 라멘(ラーメン札幌 一粒庵), 지하상가 식당가의 한 곳이다. 점심 때라 그런지 줄이 제법 있었는데, 딱 봐도 로컬들 바글바글한 분위기라 맛집임을 확신하고 대기. 15분 정도를 기다렸다가 입장했다. 입구에 자판기가 있어서 원하는 메뉴를 티켓으로 뽑아서 점원에게 주면 된다. 잘 모르면 베스트메뉴가 가장 안전하다. No.1이라는, 기운이 나는 미소라멘을 선택했다.
짭조름한 국물에 해장이 되는 느낌. 이제는 일본라멘도 워낙 대중화 된 탓에 놀랄 만큼 새로운 맛은 아니지만 본토에서 먹는 일본라멘이라는 것에 의의를. 그래도 삿포로에 다시 간다면 추천할 만한 집이다.
점심 시간 이후라 그런지 역 내 쇼핑몰에는 정말정말 사람이 많았다. 겨우 빈 자리를 찾은 한 까페에 들러 라떼 한 잔 마시면서 기차시간까지 잠시 휴식을 취했다.
평일 낮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승강장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
우리가 탄 급행 슈퍼오-조라 3호칸. 승강장 빼곡한 승객들을 보며 전날 예매해두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토마무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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