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번째 일본여행은 1995년 겨울이었다. 워낙 오래된 일이라 또렷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딘가에 꾹꾹 눌러담아 싸들고 간 김치통이 무거워 전철 사물함 한 켠에 두었는데, 시내 한 바퀴를 돌고 와 보니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것이, 우습게도 그 여행에서의 가장 생생한 기억이다. 그 해 여름 도쿄 지하철에 옴진리교 테러사건이 있었더랬다. 정체불명의 짐이라 테러폭발물로 의심되서 들고 갔나봐, 그렇게 생각했었다. 다들 모여가지고, 긴장해서 막 열어봤을 텐데 김치가 나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다른 데도 아니고 일본까지 와서 한국 욕 먹이는 짓 한 거 아닌가? 그런 말들을 하며 한참을 웃었다.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한 거리 풍경에 엄마가 감탄하셨던 기억이 나고, 나는 사람들이 한국사람이랑 너무 똑같이 생긴 것 같다는 소리를 했었더랬다. 우에노 동물원 입구의 커다란 사자개, 자동으로 열리던 택시문, 새마을호보다도 훨씬 빠르다던 신간센,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무릎까지 푹푹 잠겼던 그 눈더미들, 건물 전체가 얕게 반짝이던 금각사, 친구랑 현지에서 사서 쌍둥이처럼 같이 입고 다녔던 푸른 체크무늬 잠바, 그런 것들이 시간 순서 없이 뒤죽박죽 섞여 사진처럼 떠오르는 기억 속 일본, 그 곳은 나의 첫 해외여행지였다.
그 때 이후로는 딱히 갈 일이 없었다. 그 때 여행 말에 안 좋은 일이 있기도 했었고,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피하게 되었던 것 같음) 가까우니까 언제든지 갈 수 있다는 이유로 늘 선택지에 들어가지도 못 했던 곳이 일본이었는데, 올해의 미친 더위에 시달린 이후 1) 서울보다 시원하고 2) 비행기로 2시간 넘지 않는 가까운 곳을 찾다보니, 자연스럽게 1순위가 되어버렸다. 고민하지 말고 일본이나 가자, 며 평소보다 휴가지를 일찍 정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도쿄/교토를 갈 계획이었다. 지인들의 SNS에서도 사진이 자주 올라왔고, 때 마침 TV에서도 맛집이 자주 나와서 끌렸더랬지. 낭만적이고 예쁜 카페들이며, 아기자기 잔잔한 옛거리, 뒷골목 구석구석 노포들을 둘러볼 생각에 마음이 붕 떴지만, 들뜬 마음도 잠시, 8월의 교토여행은 한 여름에 대구를 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현지인들은 밖으로 나오지도 않는다며 잘 생각하라는 주변의 만류가 꽤 있었더랬다. 아니나 다를까, 매일 같이 확인해본 교토의 날씨는 서울만큼이나 더워보였다. 8월 말인데 괜찮지 않으려나, 아니다, 그 때도 더우면 어쩌지. 쉽게 포기 못하고 있던 찰나, 남편이 제안해서 찾아본 북해도의 날씨는 완벽했다. 더워봐야 25를 넘지 않는온도, 여행자로서는 그야말로 최적의 날씨이다. 그렇게, 이번 여름은 북해도를 다녀왔다.
침략을 일삼았던 역사, 섬나라가 주는 이미지 탓인지 몰라도 나는 늘, 일본이 꽤 큰 나라임을 잊고 지낸다. 특히,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알았던 사실 중 하나가 북해도의 면적만도 한국의 80%에 달한다는 사실. 온천에서 요양만 하다 갈 생각이라면 모를까, 막상 찾아보니 생각보다 이동거리도 길고, 구석구석 가 볼만한 곳이 꽤 많았다. 여행 책자 속 북해도는 크게 동,서,남, 북부, 중부 5군데로 나눠서 구성이 되어 있었다. 특히 동부나 북부는 거대한 늪지와 오호츠크 해의 유빙 관찰이 가능한 지역이기도 해 방문지로서 상당히 끌리긴 했지만, 애초에 카페나 먹거리를 생각하며 교토를 가려했던 걸 감안하면 다소 생뚱 맞은 코스이기도 했고, 일본이 초행인 사람에게는 너무 이질적인 느낌이라 여행코스에서 배제하기로 했다. 사실 막상 간다고 하더라도 동부의 쿠시로 늪지는 삿포로에서 기차로만 6시간 이상 걸리는 곳이라 고작 5일 남짓의 일정에서 이동으로 하루를 소모하고 싶진 않았다. 구글맵과 여행책자 등을 참고한 끝에, 가능한 기차 이동을 하는 것을 전제로 삿포로, 토마무, 노보리베츠와 중부의 후라노/비에이를 방문하는 것으로 4박 5일의 일정이 짜여졌다.
비교적 널럴하게 계획을 세웠다고 했지만 막상 돌아다녀보니 생각보다 일정이 아주 여유롭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서도 참 좋았었고, 여행이 끝나고 돌아온 뒤에는 운까지 좋은 여행이었다는 결론이 났다. 일본을 떠나는 날 아침 뉴스의 일기예보에서 태풍 북상소식이 나오길래, 태풍 피해간다며 타이밍 좋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그 다음 날, 그 태풍으로 일본은 쑥대밭이 되었다. 더 운이 좋았던 건 귀국한지 며칠 되지 않아 북해도를 강타한 지진이었다. 뉴스를 보며 가슴을 몇 번이나 쓸어내렸는지.
도착한 첫날부터 흐린 날씨에 살짝 뿌리는 비까지 있어 약간 아쉬운 마음으로 시작된 여행이었지만, 결론은 대 만족. 구글맵에서 대략적인 위치만 둘러보고 비교적 랜덤으로 갔던 식당들 거의 대부분이 다시 가고 싶을 정도로 만족스러웠고, 숙소도 모두 마음에 쏙 들었다. 무엇보다도 좋았던 건 저녁마다 갈 수 있었던 목욕탕이었다. 노곤해진 몸을 뜨거운 물에 담그고 다리를 쭉쭉 뻗으며 긴장을 푸는 하루의 마무리를 매일 같이 할 수 있다는 것이 이번 여행에서 가장 큰 행복 중 하나였다. 한 편으로는 일본, 이라는 이름에서 그저 벚꽃과 고성, 기모노, 온천 등의 이미지로만 점철된 일본을 떠올렸던 게 아닌가 싶었다. 기차로 이동하면서 보았던 북해도-그 또한 일부일 뿐일테지만-는 그야말로 신비롭고, 광활한 대자연이 펼쳐진 곳이었다. 모노노케 히메 등의 각종 애니메이션에서 나오던 거대한 숲과 정령들이 이해가 되는, 유럽이나 미국의 숲과는 분명하게 다른 신비롭고 아름다운 풍경들이 한참이고 펼쳐진다. 하루종일 보고만 있어도 행복할 것 같은 초록의 끝없는 풍경. 언젠가, 발이 푹푹 잠기는 눈과, 북해도의 유빙을 보게 될 날을 고대하며, 나의 첫 북해도 여행기를 기록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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