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기가 못내 아쉬웠던 토마무에서 하루를 보내고, 오늘은 후라노/비에이로 향한다. 검색창에 북해도 혹은 라벤더를 친다면 이 곳이 항상 연관 검색어로 뜰만큼 꽤나 유명해진 곳이다. 지금은 북해도여행시 필수코스 중 하나가 된 곳으로, 나 역시 라벤더투어를 검색하다가 이 곳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만약 작년에 남프랑스를 가지 못 했더라면 아마 이 곳을 대신 왔을 지도 모른다. 여행책자에 따르면 1960년대 초반, 다목적으로 사용되던 라벤더 오일을 얻기 위한 라벤더 재배가 후라노에서 성행했다고 한다. 70년대가 되어 합성향료가 등장하며 재배열기가 사그라들었지만, 현재 팜도미타의 창업자이기도 한 도미타 다다오가 재배를 포기하지 않았고, 1975년 일본 국철 캘린더에 팜도미타의 사진이 실린 것을 계기로 관광객이 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라벤더 명소가 된 곳.
그 동안은 기차로 주로 이동했지만, 자연경관 투어라는 특성상 오늘 하루는 렌트카로 이동하기로 했다. 한국과는 도로 주행방향이 반대인데다가 비까지 오는 바람에 긴장하면서 출발했지만, 도로에 차가 많지 않아 큰 부담은 없었다. 퍼붓듯이 오는 빗줄기 속, 전방의 산기슭에서 펼쳐지는 운해 덕에 토마무에서 운카이테라스를 보지 못한 아쉬움이 조금은 해갈되는 느낌이었다.
무섭게 퍼붓던 비가 점차 그치고 어느 덧 구름 사이 푸른 하늘이 언뜻언뜻 비치기 시작한다.
깊은 산 속, 무성한 숲의 토마무에서 벗어나 후라노에 가까워 질수록 커다란 농장이 있는 드넓은 평원과 예쁜 농가들, 각종 간판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꽤나 한적한 분위기의 시골임에도 불구하고 깔끔하게 잘 정돈되어 있었다. 토마무에서 1시간 반을 달려 팜도미타(ファーム富田)에 도착.
쭉 뻗은 가로수길 양편으로 드넓은 꽃밭이 펼쳐진다.
Welcome to FARM TOMITA !
센스 있는 보라색 유니폼.
근처 기념품샵 입구. 내부는 너무 정신사나워서 찍지 않았다. 라벤더를 이용한 각종 특산품을 주로 팔고 있다.
라벤더가 유명한 곳답게 전반적인 테마가 보라색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우리가 방문했던 시기가 8월 말이라 라벤더가 이미 져버린 탓도 있고, 작년 남프랑스에서 광활한 라벤더 밭을 이미 보고 온 탓에 사실 큰 감흥도 없었고, 유럽 어딘가라고 해도 깜박 속을 법한 풍경이라, 국적이 불분명한 관광지 같아 실망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아기자기 깔끔한 농장이며, 색색의 꽃들을 보는 재미가 있어 연인이나 가족들끼리 한번쯤 오기 괜찮은 곳이다. 어쨌거나 라벤더가 메인인 곳인데 그걸 못 보았으니 다소 밋밋했던 걸 수도 있고. 언젠가 기회가 된다며 라벤더 시즌에 한 번 다시 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것. 라벤더 아이스크림. 후라노/비에이를 가면 꼭 먹어야된다는 후기를 하도 많이 봐서, '후라노에서 해야할 일 목록' 같은, 일종의 의무감으로 샀더랬다. 다들 맛있게 먹는 것 같기도 하고, 여기까지 왔으니 먹어나보자 싶어서. 사진 찍고 나서 한 입 딱 먹었는데, 맙소사. 진짜 맛있었다. 보라색을 좋아하지만 음식의 보라색은 일단 거부감이 들었고, 라벤더향이 음식에 어울릴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어, 아무리 우유가 맛있는 동네라해도 이건 좀...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는데, 이건 완전히 나의 교만한 생각이었다. 입 안에 감도는 은은한 향이 아주 적절하다. 일종의 선이 있다면, 그 선을 아주 정확하게 잘 지킨 작품. 이것과 비슷한 맛을 먹어본 적이 없어 설명하기도 어렵지만, 후라노/비에이에 간다면 라벤더 아이스크림을 무조건 먹어야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으며, 개인적으로는 이 아이스크림을 먹기 위해서라도 다시 올 용의가 있다. 참고로, 팜도미타 내 여러 곳에서 팔고 있으며 계산은 현찰로만 가능하니, 반드시 현금을 챙겨와야한다.
알록달록 꽃의 향연을 즐기다보니 어느 덧 점심시간. 근처에 딱히 먹을 만한 집도 없어 구글맵을 돌리다 일본 가정식을 파는 식당을 발견해서 비에이로 향했다.
왼쪽은 남편이 시킨 부타동, 나는 카레라이스.
낡았지만 깨끗하게 잘 닦은 냉반에 무심하게 밥 하나, 미소 하나 툭 하나 얹어내주던 이 곳. 부타동도, 카레도 한국에서는 이제 흔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고, 여기도 사실 뭐 별 다른 거창한 맛은 아니었다. (심지어 카레는 한국과 거의 똑같...) 어렸을 때 친구네 집에 놀러가면 친구네 엄마가 해주실 것 같은 그런 마음이 따뜻해지는 맛과 메뉴들. 남펴니는 여기서 먹은 부타동이 일본에서 먹었던 음식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시종일관 미소로 맞아주던 싹싹한, 커트머리의 여사장님. 그리고 사장님과 이런저런 수다를 나누는 동네사람들의 모습도 참 보기 좋았다. 구글맵 평가대로 일본어를 배워서 저 대화 속에 끼어들어 나도 같이 수다를 떨고 싶어지는 곳. 잘 먹고 청의 호수를 보러 갑니다.
호수 주변은 하얀 자작나무가 우거진 오솔길로 쌓여있다. 바닥은 온통 흙길.
青い池 (청의 호수)
맥북 배경화면으로 너무나 유명한 이 곳. 사실 나도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청의 호수는 자연 호수가 아니라 인공적으로 (의도치 않게) 만들어진(!) 호수라고 한다. 1988년 도카치다케가 분화한 이후로 화산 사방공사 때문에 보를 쌓는 공사를 했는데, 근처 알루미늄이 함유된 온천이 이 곳으로 스며들게 되었고, 유황이나 석회질 등의 성분이 있어 이런 푸른색을 띄게 되었다고 한다. 날씨가 흐렸던 탓인지 사진에서 봤었던 정도의 선명한 푸른 색은 아니었지만, 하얀 자작나무 숲에 둘러쌓여 오묘한 색을 내고 있는 호수는 신비로운 느낌이었다. 옆에 지나가던 한국인 관광객의 표현을 빌리면 '뽕따가 녹은 것 같다.'며 지나가심...감동이 깨지는 느낌이었지만 반박할 수 없는 묘사였다. 딱 그런 색, 터키의 파묵칼레도 이런 느낌의 푸른 색이다. 호수 한 바퀴를 다 돌 때 즈음 어디선가 물소리가 계속 들려서 가봤더니 호수 한 켠으로는 꽤 큰 계곡이 흐르고 있었다. 비가 온 탓인지 누런 흙탕물이 흐르는 계곡과 호수의 푸른 색이 선명하게 대비되는 신기한 풍경. 한 번쯤 와서 볼 만한 풍경이다. 눈이 쌓이면 더욱 신비로울 것 같은 풍경.
그리고 다시 어딘가. 여긴 이름이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아 그냥 사진만...
전망대 높이가 꽤 높아 너른 평원이 쭉 보인다. 눈이 시원해지는 초록의 풍경.
비에이의 뷰포인트라는 마일드세븐언덕을 보러. 실제로 광고를 찍은 곳으로 유명해졌다고.
마일드세븐힐의 풍경. 후라노/비에이의 뷰포인트들은 위치가 뜨문뜨문 있는데다, 네비게이션에 이름을 입력하면 없다고 뜨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가느냐고? 숙소나 관광안내소 등에 비치되어있는 종이로 된 관광지도 안에 이런 명소들의 지역번호/전화번호가 있고, 네비게이션에는 이 번호를 입력해야 위치가 나온다.
켄과 메리의 나무니, 마일드세븐이니 해도 큰 기대를 할 건 없다. 사실 어찌보면 정말 별 것 없는, 황량한 들판에 있는 몇 그루의 나무가 있는 게 전부다. 하지만 그 풍경들이 영화나 광고의 배경이 되어서, 혹은 동화 같은 이야기, 멋진 사진들이 되어 사람들을 불러들인다. 풍경 자체는 대단할 건 없었지만, 탁 트인 풍경 속 하늘의 색이, 계절마다 달라지는 색들이 이 곳을 아름답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이면 하얗게 눈이 덮인 풍경은 또 다른 느낌이겠지. 늦은 오후라 사람이 거의 없어 여유로운 풍경이 참 좋았다.
날씨가 점차 개인다. 끊임없이 변하는 북해도의 노을을 보며 아사히카와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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