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2018. 8. 27. 19:33


내과 인턴 시절, 오프날 혈액종양내과 회식에 (끌려)간 적이 있었다. 당시 치프였던 선생님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간다고, 회식은 원래 오프자가 가는 거라고 해서 울며 겨자먹기로 갔는데, 진짜로 너무 좋은 곳을 가긴 했었다.  주로 선 볼 때 가는 곳이라고 들었는데, 우리 병원 근처에 이런 데가 있었나 싶었다니까. 오프 까먹고 가는 회식인데 이 정도는 먹어야지. 아 그래도 교수님 근처라 너무 게걸스럽게 보이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스테이크에 칼질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나 같이 말 주변 없는 사람이 가장 난감할 때는 회식 때 주변에 앉은 상급자(윗년차나 교수님)가 말이 없을 때다. 다행히도 J 교수님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해주셨다. 병원에 관해 시작했던 이야기의 주제가 부동산으로 넘어갔다가 고대역사까지 흘러갔고, 어느 주제에서나 막힘없이 이야기가 계속 나왔다. 거의 혼자 이야기를 이어나가셨더랬다. 교수님 진짜 아는 것 많으시구나...책을 많이 읽으시나보다. 솔직히 졸리지만 않으면 계속 듣고 싶기는 했는데, 나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 욕구보다는 집에서 자고픈 욕망이 더 간절한 오프날의 인턴 나부랭이였다. 회식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고, 나는 깜박 조는 시늉을 했다. 내 대각선에 앉아계시던 과장 교수님이 마침 기다리셨다는 듯이 '우리 인턴선생 조는 거 보니까 피곤해보이는데 이제 집에 갑시다' 라고 했고, J 교수님은 '허허 인턴 선생 피곤한가보네' 라며 머쓱하게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셨다.  평일 회식이라 참석자 모두가 피곤했던 날이었을 거다. 뭐 그랬다. 그게 교수님과의 또렷한 첫 기억이다. 


나는 주변에 의사가 없어 의사-특히 의대교수에 대한 일종의 환타지가 있었다. 의대에 들어와서 선배들을 보고, 내가 면허를 따고 또 병원에서 살아보니 의사들도 뭐 별 것 없이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좋은 사람도, 많진 않지만 정말 별로인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확실한 건 대부분이 성실한 사람들이라는 거고, 그 중 몇몇은 '아, 저 사람은 저래서 교수를 하는구나'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들 공부 어느 정도 한다는 사람들 중에서 돋보이는 그 똑똑한 사람들.  J 교수님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1년차 마지막 턴이 종양내과였고, 주치의가 되서 겪어본 교수님은 미처 몰랐던 귀여운 허세끼가 있었다. 당황할 때나 인사할 때 보이는 그 독특한 제스처-우리는 미쿡 스타일 리액션이라고 했었지. 병동에서 교수님을 마주쳐서 인사드리면 늘 그 특유의 독특한 제스처로 인사하셔서, 교수님을 마주치고 나면 매번 큭큭 웃었던 기억이 난다. 별 일 없이 주치의가 마무리되고, 이후로는 오다가다 마주친 게 전부였다. 그 때마다 늘 그렇게 인사하셨다. 4년차 되서 1년차 백 보는 날 다시 보겠거니, 그렇게 생각했다. 1년차가 끝나고 2년차 중반이 지났을 무렵, 교수님이 췌장암을 진단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초기라고 수술을 한다고 들었다. 회식 때 잘 드시던 교수님 모습이 스쳐갔다. 기가 막혔다. 왜 그 많은 암 중에, 그 병을 너무나 잘 아는 사람에게, 너무 잔인한 짓 아닌가. 일요일마다 교회도 가시고, 술 담배도 안 하시는 분인데. 그래도 아직 젊으시고, 원체 건강하셨으니까, 잘 이겨내실 거라 믿었다.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완치되서, 돌아와서 그 특유의 허세로 잘난 척 해주시길 바랬다. 


수술도 비교적 잘 된 편이라고 들었고, 이후 내가 연차가 바뀌고 종양혈액내과를 돌 때마다 신환 발표 컨퍼런스 때 종종 오셨었다. 눈에 띄게 수척해지셨고 가발이 조금은 어색했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밝았다. 전공의들의 발표를 듣고 환자들이나 항암에 관련된 이런 저런 코멘트도 하시고, 교수님들끼리 토론도 하시고. 얼굴이 좋아보이셨던 날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오시지 않았고, 얼마 전 다시 입원하셨다고 했다. 종양내과 치프인 동기는 회진차 병실에 들어갈 때마다 교수님 보기가 괴롭다며 스트레스를 받는 눈치였다. 여러 번의 항암, 말도 안 되는 황달 수치에도 교수님은 의식이 또렷했고, 본인이 잘 아니까 필요한 약 정확히 달라고 한다고,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고 얼마 전 자정 무렵 부고를 알리는 문자가 왔다. 


아마 교수님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기억했을 그 웃는 모습의 그 건강한 얼굴로, 가운을 입은 교수님의 사진,  영정사진이라기에는 너무 밝은 그 얼굴. 응급실 앞에 그 많은 교수님들과 전공의들, 병동 수간호사들의 행렬 속에 섞여 발인을 마주하고서야 그 분이 이제 정말 안 계신다는 걸 실감했다. 수 없이 많은 이들의 죽음을 봤던 우리들에게도, 오늘만큼은 유달리 길고 잔인한 하루였다. 부디 이제는 고통 없이 평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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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irind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