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착 이후 가장 큰 미션 중 하나였던 레일패스 구매를 마친 후 한결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삿포로행 기차에 올랐다. 좌석을 확인한 후 짐을 한 켠에 밀어두고 자리에 앉아 둘러본 기차 안은 좌석이며 객실 출입구 위 전광판 등 전반적인 모양새가 한국의 SRT와 굉장히 비슷하다. 옆자리에 앉은 일본인 승객이 앞좌석 헤드 뒷판에 붙어있는 플라스틱 포켓에 자신의 종이티켓을 꽂는 걸 보고, 나도 익숙한 일인 척 레일 패스에 끼워둔 삿포로행 기차표를 꺼내 꽂는다. 속으로는 오~신기하다~라고 생각하면서. 이 기차에 처음 타서 낯설고 어색하다는 걸 티내기 민망할 정도로 기차 안은 굉장히 조용했다. 공공장소에서의 예절을 이야기할 때 항상 일본을 선례로 드는 것이 이해가 가는 조용함이다. 통화를 하기 위해 전화기를 들고 조심스레 객실을 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일본을 왜 선진국이라고 하는지 새삼 깨달았다. 조용한 객차 안에 소리가 나는 건, 일본어-영어 순으로 나오는 안내방송이 나올 때 혹은 누군가 기침을 할 때 뿐이다. 매 역에 정차하고, 다시 떠날 때마다 앞으로 어떤 어떤 역이 남아있는지 안내가 흘러나왔다.
이번 여행의 첫 방문지는 삿포로로 기차의 종착역이기도 했다. 여행책자 속, 북해도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라는 소개가 허풍이 아닌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30여분을 달려, 고층 건물들이 점차 빼곡해지는 느낌이 들 때 즈음, 삿포로에 가까워졌음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에서 느껴지는 대도시의 느낌은 일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차가 멈추자, 빈 좌석이 거의 없이 빼곡히 앉아있던 승객들이 우르르 내렸다. 한 손에는 가방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구글맵을 열고, 두 눈은 출구를 찾느라 낯선 언어 속 안내판을 연신 살핀다. 승강장을 나와 개찰구를 통과하니 온통 매장이 줄지어 있는 삿포로역은 곳곳이 커다란 쇼핑몰 여러 개와 연결되는 구조였다. 퇴근시간이 겹친 탓인지 정장 차림의 샐러리맨들까지 섞여 역 안은 상당히 북적거렸다. 깔끔하지만, 세월이 느껴지는 분위기 탓에, 삿포로역은 살짝 바랜 용산역 같기도 했다.
삿포로 역사를 나서기가 무섭게, 서울보다 훨씬 북쪽(위도 42도)에 와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얼굴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뒤를 돌아보니 거대한 유니클로 간판이 보인다. 주변을 둘러보니 한국의 강남이나 명동 길거리에서 간판만 일본어로 바뀐 것 같은 풍경이었다. 예전에 2009 로스트 메모리즈라는, 일제 치하가 현대까지 지속되었을 때를 가정한 배경의 영화가 있었는데, 영화 초반에 나오던 서울풍경이 딱 이런 모습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닮기도 어려울 것 같은데, 누가 먼저일까. 외국여행이라는 설렘을 느끼기에는 너무 친숙한 풍경이었지만, 서늘한 날씨가 이국에 도착했음을 확인시켜주는 것 같았다. 한국보다 시원해서 좋네 길거리가 깔끔하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15분 정도를 부지런히 걸어 숙소에 도착했다. 오픈한지 2년도 되지 않은 새 건물답게, 로비며, 크지 않아도 필요한 건 빠짐없이 갖춘 방은 정갈하고 깔끔해서 마음에 쏙 들었다. 가방을 열어 챙겨온 긴 옷을 몽땅 꺼내 껴입고, 혹시 몰라 우산도 챙긴 뒤 다시 숙소를 나섰다. 비행기 이륙 전 라운지에서 먹은 음식이 전부였던 터라 허기가 강하게 몰려왔다. 식당과 각종 술집이 모여있는 스스키노(すすきの, 삿포로 시내 최대 번화가) 쪽으로 가면서 중간에 TV 타워를 들르기로 했다.
에펠탑을 축소시켜놓은 것 같은 TV 탑은 1957년에 세워진 것으로 오후 5시부터 조명이 들어온다고 한다.
타워 맞은 편 쪽으로 큰 공원이 있다. 찌는 듯한 더위에서 갑자기 서늘한 곳으로 오니 분수에서 튀는 물방울도 새삼 더 차갑게 느껴진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분수 주변에 사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현대화된 재래시장에 지붕을 씌워놓은 듯한 느낌. 온갖 가게가 뒤섞여있는 이런 풍경이 몇 블럭이고 이어진다.
번화가에서 한 골목만 뒤로 가도 아담한 규모의 각종 식당이며 이자카야 등이 줄지어 있는 광경을 볼 수 있다. 따뜻한 색의 조명 아래, 저마다의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집에 가기 전 술 한 잔하며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이 앉아있는 일본의 저녁 풍경. 평범한 일상의 풍경인데도, 관광객의 마음이라 그런지 괜히 저 속에 껴서 같이 술도 한 잔 하고, 꼬치요리도 주문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골목 사이사이 곳곳에 자전거 보관소가 보인다. 삿포로 역에서 숙소로, 또 숙소에서 다시 스스키노까지 걸어오는 거리 내내 오르막도 내리막도 없어 자전거 타고 다니기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골목을 기웃거리며 뭘 먹을까, 고민하던 중 구글맵에 다루마라는 양갈비 집의 평가가 괜찮아 가보기로 했다. SNS,블로그 속 온갖 낚시성 광고가 판을 치지만, 구글맵은 아직 믿을 만한 정보통이다. 10여분을 더 걸어 드디어 목적지를 발견!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 건물 한 바퀴를 거의 휘감듯 길게 늘어져 있는 줄에 기함했다. 일정상 양갈비를 먹을 수 있는 날이 오늘 밖에 없던 터라 그냥 줄 서자며, 일단 줄 끄트머리로 갔다.
중간중간 나오는 사람들을 보며, 그 동안의 대기경험을 총 동원, 착석까지의 예상시간을 50분으로 예상해보았다. 기다리는 중에 찾아봤더니 다루마(だるま)는 본점을 포함, 총 3곳의 매장이 있다고 한다. 다른 두 매장도 멀지는 않았지만, 어디든 대기하는 건 마찬가지였으며, 우리가 온 다루마 5.5가 가장 최근에 오픈한 곳으로 그 중 가장 큰 매장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현지인도 많이 오는 분위기라 신뢰도 가고, 아예 다른 식당을 가려고 구글맵을 열어보니 가까운 곳에 갈만한 곳이 마땅치 않아 결국 계속 줄을 서기로 했다. 매장 입구까지 다가가고, 이제 곧 먹겠구나 싶어 기분이 좋아지려는 찰나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다.
밖에 서 있는 줄보다 더 많은 인원이 실내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 우리 바로 앞 일행-일본 직장인 3명-은 매장 입구에서 안을 들여다보더니 포기하고 가버리길래 처음에는 뭣도 모르고 좋아했는데, 지금까지 기다린 만큼-혹은 더 이상- 기다려야하는 걸 알았던 게지. 사진 속 식사하는 사람들 뒤에 보이는 인원이 모두 대기 줄이다. 뒤에서 대기하는 사람은 식사하는 사람 바로 뒤에서 갓 구워진 고기가 입에 들어가는 풍경을 보고만 있어야 한다. 이건 너무도 신박한 고문 아니냐며, 심리적 압박으로 매장을 운영하는 것 같다고 이 기묘한 대기 시스템이 참 특이하다는 이야기를 몇 번이나 했던 것 같다. 밖에서 기다리는 시간만큼 안에서도 기다려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중간쯤 가면 앉을 의자가 생긴다는 것. 이 기묘한-한국에서 본 적 없는- 대기는 겨울에 오는 사람들을 위한 나름의 배려이려나. 겨울에도 사람들이 줄을 서는 곳이라고 한다. 여름에도 서늘한 이 곳을, 겨울에 오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온갖 궁금증이 솟는다.
우리도 곧 저기 앉으리라. 기다리며 미리 메뉴를 정했다. 재미있었던 게 실내에서는 더 괴로울 줄 알았는데, 계속 고기 냄새를 맡으니 오히려 허기도 누그러지고, 곧 내 차례겠거니 싶어 의외로 덤덤해지는(?) 기분. 예상했던 대기 시간 50분은 이미 넘긴지 오래다. 일행도 없고, 핸드폰 배터리도 간당간당하다면 그 동안 살아온 인생도 되돌아 볼 만큼의 긴 시간이다. 한겨울인 1월에 떨면서 1시간을 기다렸다는 사람의 후기를 우연히 발견하고, 여름에 온 우린 양반이려니 하며 허허 웃었다. 그래도 너무 길다. 장거리를 이동한 탓에 점차 피로가 몰려왔다. 그냥 편의점 가서 라면이나 사서 숙소로 돌아갈까, 한계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낀 순간 자리가 났다.
주문을 받자마자 종업원들이 익숙한 손놀림으로 빠르게 세팅을 하고, 화로 위에 조그만 양기름 덩어리를 올리고, 한 입 크기로 썰은 대파와 양파를 쏟아놓는다. 한국처럼 쟁반 하나에 주문한 고기를 모두 담아오는 게 아니라 메뉴/인수 별로 고기를 다 따로 담아서 내온다. 양이 많지 않아 4인분을 시키니 접시 4개가 쫙 깔려 약간 민망했다. 고급메뉴도 주문해봤는데, 기본이 가장 괜찮아서 결국 추가로는 기본만 더 시켰다. 쯔란 등을 제공하는 중국식 양고기 요리와 달리 간장베이스에 고춧가루 등을 섞어 찍어먹는 소스도 궁합이 좋았다. 뜨거운 양기름에 튀기듯 데워진 양파도, 대파도 고소하고 달큰한 맛이 일품. 얼핏 피클처럼 보이던, 절인양배추(기본으로 나오는데 유료임)도 잘 어울렸다.
사실, 개인적으로 양고기보다 더 기대했던 메뉴는 바로 삿포로 클래식비어였다. 내수가 충분해서 수출하지 않기에 북해도에 와야만 먹을 수 있다는 바로 그 맥주. 그래서인지 삿포로 시내 술을 파는 곳이라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삿포로클래식비어를 마실 수 있다는 광고가 걸려있다. 막상 테이블에 앉으니 너무 피곤해서 술을 마셨다가는 뻗을 것 같아 남편 것만 시키고, 몇 모금 마셔봤는데, 결국 내 맥주도 시켰다. 삿포로하면 맥주라더니 역시. 피곤하지 않았다면, 주량만 충분했다면 몇 잔이고 마시고 갔을 것 같다. 작은 공기밥까지 시켜 함께 먹고 나니 배가 점차 불러왔다. 기다린 시간, 내 뒤에 대기자가 앉아있다는 사실을 까먹을 정도로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작은 매장이었지만 환기 시스템이 잘 되어있는지 생각만큼 옷에 냄새가 많이 배지 않아서 더 좋았다.
만족스러운 첫 식사를 잘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대욕장을 다녀온 후 기분 좋게 취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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