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지만, 막연하게 나마 남아있는 첫 기억은 9살 즈음이었다. 가슴이 너무 빨리 뛰고, 답답하고 어지러웠다. 몇 번 의식을 잃은 적도 있었다고 했고, 발레나 피아노를 갔다오면 입술이 새파랗게 되서 앉아있는 일도 몇 번 있었다고 했다. 지금 돌이켜보건데, 그 때 나를 진료했던 동네 소아과 의사 선생님이 명의였다. 엄마 말씀으로는 나를 진찰해보더니 부정맥인가? 라며 혼자 중얼거리며 갸우뚱하더니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워낙 많이 알려졌고, 지식도 많아졌지만, 내과의사인 나도 부정맥은 아직도 어렵고, 응급실에서 마주치면 가장 두려운 병 중 하나이다. 1990년 대에 부정맥은 병명조차 생소하던 시절이다. 엄마는 어찌어찌해서 신촌 세브란스에 부정맥을 잘 아는 교수님이 있다는 것을 수소문해서 진료를 보러 가게 되었다. 이제 그 분은 은퇴하셔서 더 계시지 않지만, 대한민국에서 부정맥의 시조 같은 분이다. 아직 어리니 시술하지 말자고, 좀 더 크면 하자고., 그렇게 몇 년을 다니고, 고 1로 올라가기 전 부정맥 시술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건강해졌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 나의 그 비실거림은 부정맥 탓이었던 것 같다. 항상 기운 없고, 피곤하고, 밥 잘 못 먹고, 조금만 예민하거나 걱정이 되어도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가슴이 두근거리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누워서 쉬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쉬고 있어도 몇 시간이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이 잦았다. 기절하다시피 한참을 자다가 일어나보면 두근거림은 멎어있었다.
진단을 받은 이후 학년이 올라가면 엄마는 늘 연초에 담임선생님을 찾아 면담을 했다. 힘들 것 같은 상황은 늘 열외가 되었다. 체육시간에는 뛰지 못한 채 늘 앉아있었고, 체벌에서조차 예외되는 일이 많았다. 입 짧고 챙겨 먹기 귀찮아하는 딸을 둔 우리 엄마는 본의 아니게 늘 도시락이며 각종 (보)약을 따로 챙겨주는 극성(?) 엄마가 되어있었다. 툭하면 양호실에 갔었고, 조금이라도 몸이 안 좋으면 조퇴를 하는 일이 잦았다. 같은 반 친구들이 매점이나 화장실에 우르르 몰려가고, 교실 뒤에서 HOT나 젝키춤을 따라할 때 나는 자리에 앉아서 책만 읽었다. 뛰어다니고, 집에 늦게 가고, 불량식품을 사먹고, 그런 흔하고 별 것 아닌 소소한 일탈조차 생각할 수 없었다. 언제 또 그렇게 가슴이 두근거리고 아찔하고 죽을 것 같은 무서운 기분이 들지 알 수 없었으니까. 일단 증상이 생기면 내가 할 수 없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몸이) 힘들다고 느끼면 증상은 갑자기 시작되었고, 내가 지쳐서 잠들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겁이 많았던 나는 얌전하게 살 수 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내가 얌전하고 수업태도가 좋다고 예뻐했다. 집에 가면 피곤해서 일단 쓰러져 자기 바빴고, 부모님도 내 체력이 시원찮은 걸 아니 공부하라는 말도 없었고, 학원도 거의 보내지 않았다. 소심한 탓에 나름 성실한 편이었고, 또래들과 달리 가수나 연예인에도 별 관심이 없던 내가 집에서 하는 일은 책을 읽거나 숙제를 빼놓지 않고 착실하게 하는 거였다. 당연히(?) 성적이 좋을 수 밖에 없었다. 까지지도 못 했고, 겁대가리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던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런 것들 뿐이었다. 한 마디로 재수 없는 모범생이었다.
열 몇살 된 여자아이들이 친하지도 않은 애가 몸이 안 좋고 갑자기 쓰러질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면 나를 괴롭히지 않고, 이해해줬을까. 하지만 나는 담임선생님이나 아주 친한 몇몇을 빼고는 굳이 내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몰랐던 아이들 눈에 내가 받았던 일종의 특혜는 왕재수였겠지. 드센 아이들 일부는 나를 괴롭혔고, 나는 중 1 중반부터 중2 초반까지는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는 왕따였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말도 안 되는 걸로 나에게 욕을 하며 소리를 지른 애도 있었고, 청소하고 빈 교실에 돌아오면 내 가방은 바닥에 떨어진 채 발자국이 나 있는 경우도 있었다. 몸이 아프다는 건 그런 거다. 평범한 삶에서 살짝 혹은 많이 비껴서 산다는 것. 그래서 원치 않는 오해를 받으며 살수 있다는 것.
그렇게 시간이 흘러 21세기가 되었다고 시끌벅적하던 무렵 나는 시술을 받았다. 감사하게도 그 때 이후로 참 별 탈 없이 살았다. 입 짧고 까탈스러운 것도 모자라 먹는 양 자체가 적었던 예전에 비하면 눈에 띄게 식사량도 늘었고, 내가 스스로 느끼기에도 건강해졌다고 느낄 정도였으니. 그 전처럼 갑자기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없으니 마음이 편해졌고, 예민함도 다소 줄어들었다. 고등학교 때는 친구들과도 잘 지냈고, 왕따를 당하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고3 시절도 아픈 적 없이 순조롭게 넘겨 대학도 원하는 곳으로 갔고, 어찌어찌하다 보니 교환학생도 다녀오고 대학원까지 갔다. 4년간의 징그러운 시험 일정 속에서도 큰 무리 없이 지내고 나름 직장인까지 되었다. 그렇게 약 17년을 잘 지내던 중 작년 5월, 밤에 샤워를 하는 데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피곤해서 그런 걸까, 곧 멎겠지라고 생각했지만 두근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두려운 마음에 심박수를 세어보니 150에서 170 사이를 오갔다. 내가 아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이런 저런 시도를 했고, 2-30분이 지났을 무렵일까, 심박수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설마..했다. 그 때만 해도 그냥 피곤해서 잠깐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작년 9월 어느 날, 병원에서 CPR이 터졌고, 병동을 뛰쳐 올라가는 데 다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CPR은 이식실에서 일어난 거였고, 도착했을 때 이식실은 난장판이었다. 그 난리통에 '나 이상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환자가 중환자실로 옮겨지고, 대충 일이 마무리되었을 때도 증상은 계속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행이다. 병원에 있을 때 그런 일이 있어서. 동기의 조언대로 심전도실로 갔고, 기록이 선명하게 나왔다. 심전도에는 PSVT가 찍혀있었다. 3분 가까이 연속으로 심전도를 찍는 와중에도 증상은 계속되었다. 그만해주세요. 라고 말했다. 심전도실의 직원이 괜찮냐고 우려의 눈빛을 보냈고, 이러다 괜찮아져요. 라고 말했다. 그리고 5분 정도 지나고 또 거짓말처럼 괜찮아졌다. 심전도 뭉치를 들고 교수님을 찾아갔다. 이거 제 심전도인데요, 교수님. 이라는 말에 교수님은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곧 '너가 제일 잘 알겠네. 진료 봐야지'라고 대답해주셨다. 증상이 없던 어느 날 다시 심전도를 찍었고, 심전도에는 delta wave가 찍혀있었다. 설마 WPW 인가. 부정맥 담당 교수님을 찾아갔고, 교수님은 맞네요. 라고 대답해주셨다. 곧 바로 이것저것 물어보시더니 그럼 시술해야죠. 라고 하셨다. 나가는 내 뒤통수에 대고 앞으로는 뛰지 마요. 라고 웃으며 이야기해주셨다. 그리고 2일 전 재시술을 받고 어제 퇴원했다. 시술은 잘 되었다고 한다.
예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예전에는 아무 것도 모르고 받았던 그 시술을, 이제는 다 알고 받으니 오히려 더 무서웠다는 것. 첫 시술 때는 어려서 재웠던 것 같은데, 그 때도 사실 시술 받다 깨서 뭔가 힘든 기억이 있다. 그 짧고 막연한 기억 때문에 시술 전에 걱정이 되었더랬다. 병가를 내고 교수님께 인사드리러 갔을 때도 농담반 진담반으로 다 알고 어찌받냐고, 재워달라고 해~라고 하셨으니.
국소 마취를 해서 femoral puncture는 생각보다 별 느낌은 없었다. CAG를 같이 했던 탓에 조영제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는데, 약간의 열감 외는 별 다른 느낌은 없었다. 하지만 정말 예상외로 심했던 통증은 ablation의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났다. 뭐라고 표현하기도 어렵다. 가슴 깊숙한 곳이 타들어가는 느낌은 살면서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불쾌한 기분이었다. 나중에 아데노신이 들어갈 때는 저 깊은 곳에서 누군가 심장을 움켜쥐고 땅 속으로 순식간에 끌고 내리는 느낌에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공포감을 느꼈달까. 너무 아프면 욕 나온다는 그 기분이 십분 이해되는 순간. 그래도 어쨌거나 다행히 시술은 잘 됐다고 한다. 끝나고 ABR할 때도 너무 힘들었지만, 뭐 그래도 피가 안 나는 게 더 중요하니까.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가끔씩 뻐근한 느낌이 들지만 좋아지겠거니하면서 있다.
여튼 이 장황한 스토리는 앞으로도 지켜봐야겠지만, 아직까지는 HAPPY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찌보면 내가 (내과)의사가 된 것도 알게 모르게 이런 경험들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살면서 모든 걸 경험할 필요가 없다. 가능하면 안 좋은 경험은 하지 않는 게 가장 좋은 일이긴 하지만, 사실 겪어보지 못 하면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 중 하나는 아픈 거다. 환자로서의 경험을 가진 의사의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감사하게 생각한다. 유세라고 해도 좋다.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한다. 안 아파보면 모른다고. 그래서 아픈 사람들을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고, 감히 말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별 탈 없이 자라게 도와주신 부모님, 그리고 나의 예민함, 까칠함과 강박적인 면도 이해해주는 남편께 감사하며 내가 아는 모두가 건강하고, 아프지 않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