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을 정리하는 글을 쓰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조차 없이 새해를 맞이했다. 운 좋게도 오늘부터 휴가라 간만에 집에서 모니터 앞에 앉았다. 누군가 나에게 2015년에 뭐했어? 라고 물으면 바빴다는 말 외에는 딱히 대답할 말이 없다. 바빴다고 새삼 실감하는 이유가 사실 이 글을 쓰면서 올해를 기억할 만한 사진이 있나 싶어서 핸드폰 사진첩을 뒤적이는데 세상에나. 온통 다 일에 관련된 사진 밖에 없다. 원래 셀카를 잘 안 찍는 편이고, 그나마 찍는 사진이 지나가다 보는 예쁜 풍경, 하늘 사진 등등인데 최근 몇 달 사이에는 당직일정표라던지 내 환자들 상처나 수술 사진 아니면 인계 관련해서 찍은 사진들뿐이다. 나 이 정도로 여유 없이 사는 사람 아닌데. 그래도 기억하고 싶은 사진 몇 장은 올려야지. 사진 순서는 대중 없어 산만함 주의.
이건 여름날 우리의 짧은 일탈의 기록들. 내가 여름휴가 다녀온지 얼마 안 되서의 일이다.
평일날 우리도 강남 잘 나가는 언니들처럼 놀아보자며 남양주 드라이브 후 급 가게 된 신라호텔. 망빙은 맛있었지만 이 돈 내고 이걸 먹겠다고 (이 곳에 예사로) 오는 사람들의 심리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이건 가격대비 정말 아니다 라는 결론을. 부익부 빈익빈의 슬픈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며, 내세를 기원하는 슬픈 하루의 마무리.
동해 번쩍
서해 번쩍
1주일 남짓한 시간. 병원 밖이라 몸은 편했지만 가시 방석에 앉아 있는 것 같았던 시간이었다. 얻은 건 조금 더 늘어난 오프와 조금 더 탄탄해진 동기들간의 애정 뿐이었다. 정작 우리가 얻어내려던 건 얻지 못 했지만 더 중요한 걸 확인할 수 있었던 시간이라는 데 의의를 둬야지. 그것만으로도 행운이 아닐까.
오프날 집 앞 풍경. 길 건너다가 횡단보도 한복판에서 찍었다.
어느 당직 다음 날 아침 풍경. 이때까지만 해도 창 밖 보면서 기분 좋았는데 이 날 일폭탄 + 진상환자 폭탄 맞았던 기억이. 낮시간은 어차피 병동에 갖혀있으니 해를 못 보는 건 어쩔 수 없다만, 해가 짧아진 11월 경부터는 유일하게 하늘을 볼 수 있는 출퇴근 시간조차 해를 보지 못한다. 뱀파이어가 된 기분이다.
당직날 잠시 병원 밖 산책. 호수 보며 커피 마시다 들어온 기억..이게 8월 아님 9월쯤 사진인데 이 이후로는 풍경사진이 없다.
환자에게 받은 홍시박스
11월 11일 병동에서 받은 빼빼로
밥 먹을 시간은 없으니 배는 액체로 채워야 제맛..
우리 병원에서 제일 불쌍한 1년차가 생일이라고 자기가 아껴먹는 홍삼액을 줬다.
생각지도 못 했던 생일 선물들. 퇴근을 한시간 앞두고 신환을 7명 보내준 교수님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했지만 그래도 난 1년차 나부랭이니까 성실하게 신환 다 보고 나왔다. 이 와중에 교수님은 아무 연락도 주지 않으신 채 퇴근 시간을 30분 넘긴 타이밍에 병동에 나타나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회진을 돌았던 기억이. 회진 끝나고 다시 신환을 보러 가려는 나에게 교수님이 병원식당에서 저녁 같이 먹자는 말에 거의 척수반사 수준으로 오프입니다라고 대답해 버렸다. 사실 오늘 제가 생일입니다. 라는 말씀을 드렸더라면 교수님도 나도 서로 덜 민망했으려나. 그래도 이 날 진짜 너무 힘들어서 표정 관리가 안 됐다. ㅠㅠ 완전 지쳐서 터덜거리고 나오는데 마취과 1년차 동기에게 정말 생각치도 못하게 연락 받고 너무 좋은 선물을 받아 콧등이 시큰했다.
황당하게 암을 진단 받았던 내 환자. 복수천자 처음 했던 날인데 교수님께 노티 드리려고 찍었던 사진. 색깔 보고 처음에는 SBP인가 싶었는데 나오는 양상도 그렇고 영 예감이 안 좋았는데 아니나다를까 검사에서 malignant cell이 확인되었다. 환자는 50대 후반의 아주머니였고, 몸 상태를 생각해봤을 때 진상을 부릴 법도 한데 참 점잖은 분이었다. 환자도 그렇지만 그 보호자를 생각하면 마음 한 구석이 편치 않다. 보호자는 남편이었는데 얼굴이 참 단단해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랬던 남자가 아내의 진단사실을 그토록 부정하기에 1시간에 걸쳐서 설명하고 직면을 시킬 수 밖에 없었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당연한 거지만...그래도 치료를 진행하려면 어쩔 수 없었고,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그 상황도, 나도 참 싫더라. 결국 무너져서 내 앞에서 눈물 보였던 날이었더랬다. PET CT에서는 복수 전체에 암이 퍼진 소견이 나왔고, 환자는 급속도로 안 좋아져서 원발암을 찾기 위한 work up 검사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컨디션이 되었다. 원발암 찾으려고 할 수 있는 검사는 다 스케쥴 잡았는데 상태 안 좋아서 조직검사는 결국 실패했고, 혈압이 자꾸 떨어져서 투석도, 복수천자도 불안한 상황이 되었다. 승압제를 단 채로 종양내과로 전과되었는데, 암이 확인된지 1주 남짓한 시간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환자는 결국 진단 받은지 2주도 안 되서 expire. 비겁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그 날 당직이 아니었던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을 볼 자신이 없는 환자여서.
정신줄 놓았던 어느날의 뻘처방.
새벽 3시에 어처구니 없이 응급실에서 온 환자. 척추 골절인데 열 난다고 내과로 입원함. 이거이 무슨.....
동기 휴가 가기 직전 골병 난 나. 주치의 주제에 링겔 달고 일함. 병실 들어가니까 환자들이 내 앞에서 아프다는 얘기를 안 한다.
그리고 동기가 휴가를 가던 날 받은 환자 37명.............................40명중 3명은 MICU에 있어서 내가 안 봤으니까. 정말 37명 받으면서 첫 환자 보던 첫 3일은 미쳐버릴 것 같았지만 다행히도 큰 일 없이 무사히 잘 지나갔다. 오늘부터는 내가 휴가라 내 동기가 이러고 있겠지. 신장내과 턴이었고, 교수님들이 그나마 배려해주셔서 신환이 막 몰려오는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하루가 24시간이라는 건 변함이 없고, 내 능력이 갑자기 늘어나지는 않는다. 환자 30명 넘는데 주치의 안 했던 환자는 파악이 더 안 되니까 원래 내 환자였던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2순위로 몰리는 것도 그렇고. 아침 6시반부터 스테이션에 나와서 앉아있고, 유일하게 먹는 점심조차 못 먹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매번 밤 11시가 넘어야 그날 오더를 간신히 다 낼 수 있었다. 성격이 소심해서 생각보다 일을 막 하지도 못하는 성격까지 조합되었으니 정말 목요일 쯤에는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고, 감기약 먹어가면서 이렇게 일을 해야되나 싶고...환자 많고 어차피 같은 과 환자니 진단명이나 과거력이 다 거기서 거기니 나중에는 누가 누군지도 모르겠더라. 법적으로 주치의 한 명이 환자 20명 이상 보는 건 법으로 막아야 되는 법안이 만들어졌으면 한다. 이건 환자한테도 정말 아니야.
이제는 병원 밖에 있었던 흔적도. 오프날 일이 있으면 나름 인간의 행색을 하고 병원 밖의 세상도 갔더랬다. 내 핸드폰에 있는 사진 중에 공개할만한 사람같이 나온 사진은 이것 뿐이라...동기 결혼식날 사진. 카메라도 안 보고 웃고 있는 걸 보니 분명 앞에 뭔가 먹을 게 있었던 듯.
반년간 병원 밖에서 먹었던 사진들. 난 솔직히 스물일곱살만 넘어도 굉장히 우아하게 살줄 알았는데 인생 낙이 그냥 집에서 늘어지게 쉬거나 맛있는 거 먹는거다. 병원 들어간 이후로 아침 안(못) 먹는 게 습관이 되면서 양은 확실히 줄었다. 예전 먹던 양의 2/3 정도 밖에 못 먹는 듯.
광장시장 육회. 이것은 사랑입니다.
그 유명한 신라호텔의 망고빙수. 심심하면 이거 먹으러 온다는 분들은 뭐하시는 분들인지..
인스타에서 좋아요 50개 받은 사진 -_-;
오프날 집에서 밥하기 싫으면 자주 가는 코엑스 하동관. 혼자 가서 진짜 잘 먹는다. 그러고 집에 와서 바로 엎어져 잠.
1년차를 버티게 해준 나의 정신적 지주 짝궁에게 늘 감사한다. 1년차 주치의가 배우자인 덕분에 짝궁의 요리실력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지금부터 보이는 음식 사진은 모두 짝궁 작품. 나는 그냥 밖에서 돈 많이 벌어야겠다. 나도 요리 잘 하는데 이제는 짝궁이 너무 잘해서 나는 그냥 돈 더 많이 버는 게 낫겠더라고.
2015년에 있었던 그 수많은 일들 중 그래도 꼭 남기고 싶은 기억들만 적다보니 글이 어지간히 산만하다. 그래도 1년차를 그럭저럭 무사하게 지나갔다. 2달 지나면 새로운 1년차가 들어오고, 난 이렇게 2년차가 된다.
살면서 가장 바빴던 한 해였다. 재작년, 그러니까 인턴할 때는 그 때가 가장 바쁘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더라. 주치의를 하게 되면 더 힘들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막상 닥쳐오고는 감흥없이 그냥 일을 했는데 생각해보니 퇴근시간에 제 때 집에 가 본 기억이 없다. 제 시간에 퇴근하게 되면 꽤나 감격적인 하루의 마무리였다. 제시간에 퇴근하나 늦게 퇴근하나 집에 가면 뻗어버리는 건 매한가지였지만. 살면서 책임감이라는 말을 가장 실감했던 1년이었다. 내 이름으로 된 환자가 있다는 게 이렇게 무거운 일인줄 미처 몰랐더랬지. 소심한 성격 탓에 나 몰라라 환자 던지고 가지 못하는 성격이라 그나마 별 일 없이 그럭저럭 지났던 것 같다.
인생이라는 게 참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난 내가 내과의사를 하게 될 줄은 몰랐더랬다. 내 짝궁도 마찬가지. 사실 나는 정신과를 가고 싶었고, 짝궁은 내과를 가고 싶어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내과 전공의가 되어있고, 짝궁은 정신과 전공의다. 둘 다 본인은 아무 생각 없이 있었는데 각 과에서 캐스팅(?) 당해 갔음.
인턴 때 (감사하게도) 내과, 신경과 등에서 픽스 시켜주겠다며 치프 선생님들로부터 거절하기 미안할 정도로 연락이 왔었는데 그 때는 정신과에 대한 욕심을 접을 수 없어서 거절했었다. 그런데 인턴 끝나고 밖에서 지내보니 이미 의사로 살기로 결심한 이상 전공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고. 그래도 원래 하고 싶었던 전공에 대한 욕심으로 3-4달을 정말 매일 고민했었다. 내가 정말 고민 많이 했다고 느낀 게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연락해서 물어보고 그랬거든. 평소의 나라면 절대 그러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날엔가 결정적인 조언을 하나 듣고, 펑펑 울고 정신과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다시는 돌아보지 않기로 결심도 했고, 내과를 가기로 했다. 그렇게 들어가게 되었는데, 겁을 먹고 들어가선지 몰라도 생각보다 할만하기도 했고, 이렇게 들어갔는데 안 맞으면 어쩌지라는 고민을 하게 될 줄 알았는데 그러기에는 일이 너무 많았다. 고민을 할 틈도 없이 앞에 쌓인 일들을 처리하다보니 1년차가 이제 2달 밖에 남지 않았다. 공부를 너무 안(못)해서 문제다만 지금까지 큰 불만없이 일한 거 보면 다행히 그럭저럭 적성에는 맞는가보다.
딱히 거창하게 새해 계획을 세워 본 적도 없다만 바라는 건 딱 하나다. 지금 내가 하는 일 성실히 끝까지 잘 하는 것. 조금 더 바라는 게 있다면 나와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 모두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지금 이 글을 읽을 당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