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 양억관 옮김 (2013)
얼마 전, 이 책이 갑자기 생각나서 다시 펼쳐보았다. 책 뒷편의 출판정보를 찾아보고 나서 출간되기가 무섭게 바로 사서 읽었다는 것이 다시 기억났다. 그렇게 산 책임에도 불구하고, 책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깜빡할 만큼 처음 읽었을 때 별 감흥이 없었던 터라, 하루키 책이 뭐 비슷하지라는 결론만 남았다. 이래서 제목을 잘 지어야하나, 읽고 난 감상조차 제목을 따라간다 싶어 책장 깊숙이 넣어버렸는데, 몇 년이 지난 지금, 쓰쿠루와 비슷한 연배가 되어서 그런 걸까. 색채가 없다고 생각했던 그 이야기가 마음 속 어딘가를 진하게 물들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다 지난 일이지, 라며 연륜이 생긴 척, 잊은 척, 쿨한 척해도 슬쩍만 더 헤집으면 나도 모르게 씁쓸해지고, 생생하게 떠올라 부끄러움에 이불킥을 하게 만드는 기억들이 있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 때도 알았더라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도대체 너는, 나는 그 때 왜 그랬던 걸까. 나조차도 알 수 없는 그 때 나의 마음들을. 그래도 지금 이 아쉬움을 그 때도 알았다면, 조금 더 참았겠지. 그 때 그 말들을 삼켰더라면. 그렇게 뒤돌아서지 않았더라면.
하루종일, 매일 같이 보면서도 모르다가 이야기를 듣고, 아 그래? 이러면서 유심히 살펴보면 그제서야 보이는 상처 같은 것들이 누구에게나 하나쯤은 있다. 몰랐다면 영원히 모른 채 살테지만, 한 번 존재를 알고 나면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들이. (만일 그런 게 없다면 다행일 수도 있겠다.) 고3 올라가기 얼마 전이었던 것 같다.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가 오래도록 아물지 않았던 첫 기억. 어린 마음에 내가 준 상처는 생각하지 못 했고, 너는 냉정하고, 못 되서 나만 만신창이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더 질척대지 않게 해준 냉정함에 감사하면서도, 곱씹을 수록, 내가 이 세상에서 없어진들 너가 전혀 상관하지 않을 거라는 막연함은 더욱 또렷해졌다. 상처가 사라지지 않고 흉터로 영원히 남아버릴 것 같은 불안함에, 상관 없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며 괴롭혔다. 내가 무슨 감정인지조차 알 수 없어 놓지도 못하는 관계를 겪은 후에야, 너보다 잘난 줄 알았던 내가 결국 보잘 것 없었다는 걸 깨닫고, 스스로가 하찮아 견딜 수가 없었다. 그걸 깨달으라고, 그 동안 내가 줬던 모든 상처들이 한 꺼번에 이렇게 돌아와, 벌을 받는 걸지도 몰라. 이제는 그 전의 마음이라는 건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고.
"...어이, 이런 거 엄청난 패러독스라는 생각 안 들어? 우리는 삶의 과정에서 진실한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발견하게 돼. 그리고 발견할 수록 자기 자신을 상실해 가는 거야." (24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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