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2015)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간만에 본 묵직한 영화였다. 너무나도 많이 다루어진 이야기이고, 누구나 아는 이야기라 뻔한 전개 뻔한 결말을 안고 시작한 위험을 감수한 영화일텐데, 그 뻔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오프닝에서 사도를 맡은 사도세자(유아인)의 강렬한 등장부터 한 순간도 긴장을 놓지 않고 보았다.
왕가에서 가족끼리의 살육은 단지 영조와 사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 속에서만해도 영조(송강호)는 재위 기간 내내 경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에 시달렸고, 바로 그 전의 임금인 숙종이 자신의 아들인 경종을 낳은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영조의 입을 통해 나온다. 요즘 SBS에서 곧 시작한다는 육룡이나르샤에서도 유아인이 이방원으로 나오던데 이방원 역시 배다른 형제들을 처단하고 왕에 오른 인물이고. 뭐 조선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왕가에서 일어난 온갖 존속살해는 명분이 어떻든 결국 권력싸움이고, 그 권력을 위해 가족이라도 죽일 수 밖에 없는 아이러니를 보면 왕족으로 사는 건 꽤나 피폐한 삶이었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영조와 사도의 이야기가 특히 주목 받는 건 아버지가 자신의 친아들을 꽤나 엽기적이고 섬뜩한 방법으로 죽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죽여야만 했던 이유도 사실 누가봐도 정당한 이유는 아니었으니까.
뒤주가 뭔지도 몰랐던 어릴 때는 이야기를 듣고 그냥 그런갑다-라고만 생각했는데, 뒤주의 정체를 알고 나서는 자기 자식을 그 안에 가둬놓고 서서히 죽이는 영조가 정치를 잘 했던 임금이라는 평가에 의구심이 들 수 밖에. 어디에선가 본 문구가 역사상 유래없는 비극이라고 표현하던데, 왕가에서 권력 때문에 가족끼리 죽이는 게 뭐 예사였는데 왜 저런 표현을 썼나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참 맞는 말인 것 같다. 뒤주에 갖혀 죽어가는 사도세자에 대한 막연한 이미지가 실제로 스크린 앞에 구현되자 이 형벌의 잔인함이 새삼스레 와 닿아 몸서리가 쳐졌다. 자기의 친아들에게 내리는 벌이라기에는 너무나 가혹하고 유래 없이 잔인한 형벌이다.
영화는 영조와 사도의 이야기가 비극으로 끝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두 사람의 성격과 정치적 상황이 복잡하게 맞물려있던 상황을 어색함 없이 잘 풀어내었다. 하지만 둘의 갈등이 시작되는 부분부터 전반적인 전개는 둘의 성격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같이 영화를 본 짝궁의 말 맞다나 영조는 강박증의 극치를 보여주는 성격이고 사도는 Bipolar의 기질이 다분한 성격이다. 둘이 맞을래야 맞을 수가 없다. 한 번 틀어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틀어질 수 밖에 없는 조합.
무수리의 아들이라는 컴플렉스에 평생 시달리던 영조도 어찌보면 사실 불쌍한 사람이다.
나 역시 일이 일이다보니 강박적인 면이 있는데 사실 강박적인 성격은 내가 겪어본 바에 의하면 어느 정도 타고나는 것도 있고, 일에 대한 집중도, 완성도, 성취도는 높여주는 장점은 있지만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옆 사람 꽤나 피곤하게 하는 성격이다. 완벽해야 하고, 마무리를 내가 깔끔하게 해야되기 때문에 남을 온전히 잘 믿지 못하는 게 있다. 영조는 왕으로서의 책임감, 중압감, 거기에 미천한 출신이라는 꼬리표, 형을 죽였다는 의혹에 그 지랄맞은 성격까지 조합되어 있으니 아마 평생을 컴플렉스에 시달리며 살았을 것이고, 성격이 삐뚤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 대단한 건 조선 역사상 가장 긴 재위기간(52년)의 주인공이고, 정치를 잘 했던 임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는 것이다. 스트레스로 병을 얻어 일찍 죽었다던지, 정치를 잘 못 했을 법도 한데 말이다. 유일한 오점이 아들을 죽인 것이라는 평가도 어디서 본 듯 하고. 영조는 절대로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 같다.
하지만 그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난 사도 편을 들고 싶은게 아버지가 너무 이해심이 없다 싶었다니까. 그렇게 사랑했던 아들이면 그 모든 걸 떠나서 한 발 물러서 아들이 왜 이럴까라고 이해하려는 노력이라도 해 볼 법한데, 영조에게는 그런 이해심이나 공감 능력은 전혀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냉정하고, 영리하고, 정치는 잘 했을지 몰라도, 인간관계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을 것 같은 그런 성격. 영화 보는 내내 '아 것 참 어지간히 속 좁게 구네' 싶었다.
세상을 다 줄 것 같았던 아들에 대한 사랑이 실망으로 바뀌고, 그 실망은 결국 노골적 분노와 폭언으로 점철되면서 사도는 점차 폭주하게 된다. 영화에서는 사도가 왕궁 뒤뜰에 무덤을 만들고 관 속에 누워있던지, 내시를 참수하는 장면 등이 있는데, 정확하지는 않지만 실록상에도 사도세자의 기괴한 행적에 대한 언급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사도세자에게도 분명 정신적인 문제는 있지 않았을까.
사도가 처인 혜경궁 홍씨(문근영)에게 너는 내가 안 보이냐고, 남편이 죽든 말든 상관 없냐며 소리 지르는 장면에서 난 그런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자기 남편이 죽을 수도 있는 마당에 너무 자식만 싸고 도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뭔가 남편이 문제가 있고, 답이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남편을 포기하고 그렇게 자식에게만 매달렸던 게 아닌가 싶다.
어쨌거나 영화 속에서는 이런 저런 상황들로 아들에게 실망한 영조가 사도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광기를 더 이끌어내는 기폭제로 묘사 되어있고, 두 사람이 결국 피를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억지스럽지 않게 잘 표현해내었다.
그런데 난 그렇더라. 두 사람의 성격이 정말 저러했더라면 둘의 성격만 보더라도 둘은 비극으로 끝났을 것이고, 둘 다 성격이 무난했더라도 정치적 상황은 이 두 부자의 비극을 필연적으로 초래할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마지막. 정조는 안 나오는 게 좋을 뻔했다. 감독님 소지섭 데려다가 왜 그랬어요...
★★★★
한줄 평가 : 컴플렉스는 무서운 것이다. / 다된 사도에 소지섭 뿌리기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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