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charted

불친절한 주치의

kirindari 2017. 3. 12. 13:29

 

주치의를 하면서 느끼는 것들 중 하나가 환자를 보는 방법의 차이인 것 같다. 환자를 보는 스타일이라고 해야하나. 전공의 저년차에 주치의를 하면서 환자를 보는 법을 배운다면, 연차가 올라가는 것은 그 스타일의 고착화인 것 같다. 그저 막연하게 의사는 환자를 치료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에 나는 의사가 된다면 환자에게 친절한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환자에게 희망을 주는 따뜻하고, 친절한 의사가 되자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살 수 있는 환자들이 경제적 이유로, 치료의 의지가 없어서 등등의 이유로 살지 못하기도 하고, 가망 없는 환자들이 아이러니하게도 방금 전과 같은 이유로 목숨만 이어가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환자와, 보호자와 목소리를 높이게 되는 일이 종종 생기게 되었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나도,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언젠가는 죽는다. 모두가 죽게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죽음은 남의 일이고, 낯선 일일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다가올 일이기에, 한번쯤 그 순간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피할 수 없는 마지막의 모습이 내가 원하던 모습이라면, 그건 참 행복한 삶의 마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병원에 있는 이들에게 그런 행운(?)은 잘 찾아오지 않는다.  심지어 연명치료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더라도 막상 내 숨이 넘어갈 것 같아서, 너무 아파서, 밀려오는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고 죽음을 피해 병원으로 온다.  요즘은 생존의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될 경우 적극적인 치료를 하지 않겠다는 환자의 의지를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연명치료에 관한 법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은 지금, (설사 법이 있다하더라도) 연명치료 중단은 '치료를 하는 자'의 입장에서는 직/간접적으로 환자를 방치하는 행위다.  법적으로든, 윤리적인 이유로든 어쨌거나 의사는 환자를 살려야 되는 사람이다. 늪에 빠지고 있고, 언젠가 빠질 것을 알면서도 조금이라도 더 늪 위에 있게 하려고 의사들은, 간호사들은 발버둥을 친다.  

21세기에서 사람을 살아있게만 하는 것은 생각보다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중환자실에 앉아서 가끔 베드들을 멍하니 보고 있다보면 의학 기술의 발달에 새삼 놀라움을 느끼는 순간들이 참 많다. 에크모, 인공호흡기, 각종 장치, 수액만으로도 환자는 어찌어찌 살아갈 수는 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누워만 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가능해졌다. 살아만 있는 것,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삶이라고 할 수 없는 생을 사람들은 이어나간다. 

나는 그렇게 있다면 불행할 것 같다.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도 있다만 중환자실에서 시간을 보낸 이후 나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게 되었다. 스스로가 누군지도 모른 채 누워서 보내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온전히 표현해낼 수 조자 없는 삶. 그건 삶이라기 보다 점 같은 목숨들이 이어나가는 선이다. 고통과 절망만이 남은 삶은 행복하지 않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런 저런 이유로 그들을 살아있게 하는 건 대부분 환자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배우자, 혹은 자녀들 혹은 (법적인) 보호자들이다.  그런 사람들 중에 환자 스스로 행복하다고 하는 경우는 사실 거의 못 본 것 같다. 사실 말을 아예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나마 의식이 돌아오거나 말을 할 수 있는 경우는 죽여달라고, 나를 왜 살려냈냐고 그렇게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의 대부분은 말을 하지 못하고, 판단을 하지 못하고, 때로는 움직이지 못해서, 숨을 쉬지 못해서 많은 것들을 몸 여기저기에 이은 채 지내고 있다. 하지만 가족들은, 보호자들은 환자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했다. 죽고 싶은 사람과, 혹은 살고 싶은데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매달리는 가족들. 간극이 좁혀지지 않는 순간들은 잦았고, 그럴 때마다 허탈하고, 힘이 빠졌다.

생명이라는 것이 참 그렇다. 살 사람은 어떻게든 살고, 죽을 사람은 무슨 짓을 해도 죽는다. 설명할 수 없는 환자의 경과 악화는 그냥 그 사람의 자연 경과다. 환자 침대 옆에서 쪼그려 자면서 밤새 검사를 하고, 결과를 들여다보면서 환자를 살리려고 온갖 노력을 해도 죽을 사람은 결국 죽었다. 희망과 기대와 허탈함과 아쉬움을 몇 번이나 반복하고 나서야 나는 환자를 좀 더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던 것 같다. 언제쯤  희망을 주어야하는지, 어디서 현실을 이야기해야 하는 지 배웠고, 그 옛날 내가 생각했던 의사의 모습은 결코 좋은 의사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가망 없는 환자가 속상해할까봐 그저 좋아질 거라고만 하는 의사는 환자 뿐만 아니라 주변의 의료진도 힘들게 한다. 

가망이 없는 환자에게 긍정적인 이야기만 할 수 있는 이유는 대개 딱 하나다. 끝까지 자기가 그 환자를 책임지지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가족들에게 원망 섞인 눈빛을 받을 (나 아닌) 누군가 있기에 굳이 자신이 가족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역할을 맡지 않는다는 것도 알기 때문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늘 기적을 바란다. 영화에서, 드라마에서 그런 이야기들이 늘 나오고, 기적은 당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고 속삭이고, 사람들은 그게 자신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기적은 가끔 있다. 그렇지만, 이루어지지 않을 막연하고 희박한 기적에의 기대는 희망 고문이다. 더욱이 그 것이 목숨과 관련된 것이라면, 그래서 누군가를 절박하게 매달리게 하는 것이라면 가능성 없는 희망보다 현실을 딛고 있는 절망을 알려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객관적으로 판단해줄 수 있는 것이 의사의 역할이라는 것도.  그래서 나는 친절한 의사는 되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