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s

우리가 어제 죽인 괴물 (2006)

kirindari 2015. 4. 24. 11:44

 

 

우리가 어제 죽인 괴물 (2006)

 

 

그리스 신화의 역자로 유명한 이윤기의 산문집.

담백하고 깔끔한 글이 딱 내 취향. 예전에 박완서 씨의 산문집을 읽을 때 받은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들어서 참 좋았다. 많은 사람들이 무심하게 지나칠, 어찌보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그런 소소한 일상 속에서 느껴지는 섬세한 자기 반성, 날카로운 관찰력에 감탄하면서도 마음껏 공감할 수 있었다. 인상적인 글귀가 많아 읽다말고 틈틈히 메모를 남긴 글귀도 많았다. 이런 글들을 읽을 때마다 지성인의 정의는 때로는 지식적인 면보다도 세상을 바라보는 눈, 그리고 자신이 바라본 세상에 대한 통찰력, 살아있는 양심이 가장 중요한 척도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참 부럽고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사진으로도 남겨두었던 몇 가지 좋은 글귀들을 첨부해서 남겨본다.

 

 

 

...아들딸의 행복한 학교 생활을 바라볼 때면, 나는 나에게 무수한 상처를 입히던 내 청소년 시절의 학교에 대한 쓰라린 분노를 삭일 수 없었다. 사람은 상처를 입음으로써 남에게 상처 입히는 방법을 배운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은 능멸을 당함으로써 남을 능멸하는 법을 배운다고 나는 생각한다.

                                                             <1부 하늘 아래, 누구의 고향 아닌 마음이 없다>

 

 

...한 해는, 돌아다보기에 너무 긴 세월이다. 어제야말로 돌아다보기에 마참하게 가까운 날이다. 나에게는 그렇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에게 묻는다. 어제 너는 무엇을 하였는가? 너는 <심심풀이>와 <얼렁뚱땅>과 어떤 싸움을 벌였는가?이렇듯이 완강하게 저항하는데도 불구하고, 어제 죽인 것이 <심심풀이>도 <얼렁뚱땅>도 아닌 <시간>이라는 결론에 이르는 것은 슬픈 일이다. 어제 죽인 것이 괴물이어야지 시간이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쓴 미국의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의 말이 귀에 들리는 것 같다. 20대 초반에 읽었는데 나는 아직 잊지 않고 있다.

'내가 이것을 쓰고, 그대가 이것을 읽는 순간도 마찬가지다. 시간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시계가 뱉어내는 소리는 <째깍, 째깍, 째깍>이 아니라 <상실, 상실, 상실> 이다.'

                                                                        <1부 하늘 아래, 누구의 고향 아닌 마음이 없다>

 

... 삶이란 외적 환경의 불순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긴장 관계에서 오는 끌탕을 가만히 가라앉히는 일이다. 환경의 불순물을, 혹은 긴장 관계의 끌탕을 가만히 가라앉히고 맑은 윗물을 거두어 마시는 일이다. 자주 흔들면, 자주 휘정거리면 윗물은 발생하지 않는다. 순한 사람들이 의까지 좋게 산다고 물렁하게 보아서는 안 된다. 관장 멍석말이하는 사람들은, 주로 이런 사람들이다. 그렇거니, 겨우, 마을이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