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픽처(2010)
빅 픽처 (2010)
엔젤리너스 등의 카페에 가면 구석 서가에 배치되어있는 걸 종종 보았던 책인데, 집에 이 책이 있었다는 걸 얼마 전에 알았다. 이런 책이 까페에 있다는 건 거기 둬도 될만큼 잘 팔리거나 재미있다는 이야기지. 책의 구매자인 짝궁의 강력 추천으로 집어들었는데, 3시간만에 훌훌 읽어버렸다. 우발적 살인을 저지른 월가의 변호사 벤이 살인을 숨기기 위해 자신의 죽인 사진작가로 살아가는 이야기인데, 살인을 통해 오히려 자신이 늘 꿈꾸던 사진가의 삶을 살아간다는 게 이 소설의 큰 줄거리이다. 전반부는 변호사로서의 삶, 후반부는 사진가로 그럭저럭 지내던 중 우연히 화재현장을 담은 사진이 신문에 실리면서 하루 아침에 세계적인 유명사진가가 되어버리고, 이로 인해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위험에 노출될까 두려워하며 살게 되는데, 주인공의 상황이 상황인만큼 스토리의 전개가 긴장감 있게 잘 짜여있다. 주변 인물들에 대한 디테일한 설정도 굿. 번역도 깔끔해서 더 마음에 들었다.영화화 되었겠거니 싶어서 찾아보니 예상대로 프랑스에서 영화화 되었는데, 포스터가 낯선 걸 보니 유야무야 개봉했다가 내렸거나 아니면 개봉조차 아예 하지 않은 듯.
현실을 위해 꿈을 포기하고 사는 벤의 이야기는 아마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일으킬 듯하다. 나도 한 때 천문대에서 별을 보면서 살거나, 혹은 그림을 그리거나, 아프리카에서 얼룩말을 사냥하는 사자를 직접 찍거나, 아니면 수족관에서 돌고래 사육사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더랬지. 기회가 되면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매력적이고 탐나는 삶들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은 일들이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내가 그만큼 간절하지 않았기도 했다. 그나마 벤은 꿈의 변두리를 늘 잡고 있었지만, 하지만 어찌 보면 벤도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살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꿈을 지속적으로 가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벤에게 살해당한 이웃의 사진작가 게리는 스스로 꿈을 포기하지 않고 살았다는 것에서 자부심을 갖지만, 사진가로서의 명성은 커녕 소질조차 없어 허세로 가득찬 인물로 묘사되어있고, 아버지의 신탁기금으로 그럭저럭 겨우 살아갈 뿐이다. 쓸만한 건 오직 와인취향 뿐이고, 결국은 이웃의 유부녀와 바람을 피다가 남편에게 우발적으로 살해를 당하게 된다. 게리는 예술가로서 살아가는 삶의 현실적인 단면을 보여준다. 벤이 사진가로서의 길을 선택하고 살았다고 해서 게리처럼 되지 않고, 행복하고 유명한 사진가가 되었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인간의 욕망 중 성취욕은 가장 고차원적인 욕망이라는 말을 어디서엔가 본 기억이 난다. 가장 행복한 삶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과 직업이 일치하는 게 아닐까- 라고 말하던 대학교 선배도 있었다. 꿈, 열정. 참 멋진 말이다. 그렇지만 꿈이 당장 밥을 먹여주지는 않는 게 잔인한 현실. 운이 좋아서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아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을 만큼 막대한 재산이라도 물려받았다면 모를까. 먹고 사는 문제에 치이는 와중에 자신의 꿈- 그것도 예술로 먹고 살겠다는 도박에 가까운 꿈에 매달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소설의 가장 역설적인 재미는 자신의 삶을 온전히 포기하고 나서야 사진가로서의 꿈을 이룬 벤의 이야기를 통해, 꿈을 따라 사는 것이 사실 결코 쉬운 것이 아님을 에둘러서 이야기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종군기자가 되겠다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는 영악하고, 억척스럽게 사는 가식적인 전 여친에 대한 회상이라던가, 사진을 할거라면 대학 등록금을 대주지 않겠다는 아버지의 협박 등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로스쿨에 진학하게 된 벤의 과거는 꿈을 포기하고 살아가야하는 많은 사람들의 현실을 대변한다.
소설 중후반부에 사진가 게리로 살아가던 벤은 연인과 산으로 캠핑을 가게 되는데, 하필 이날 산에서 큰 화재가 발생한다. 때마침 갖고 있던 카메라 덕분에 화재현장을 생생하게 담아낸 사진을 얻게 되고, 화재 사건을 다룬 신문, 방송 등을 통해 그 사진들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벤은 하루 아침에 세계적인 유명 사진작가가 된다. 그야말로 로또에 가까운 확률 아닌가. 이는 예술가로서의 명성을 얻는다는 것이 그만큼 쉽지 않은 일임을 보여준다.
꿈을 포기하고 사는 사람은 벤만 있는 것이 아니다. 벤은 자상하고 완벽한 남편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만, 벤의 아내 베스는 그남편에 대한 피해의식으로 결국 외도를 저지른다. 벤의 양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묘사되는 회사 선배도, 벤과 비슷한 과거를 갖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벤을 잘 이해해주지만, 성공한 변호사가 된 후 시한부 통보를 받는다. 작가는 다양한 주변인물들이 자신의 꿈을 포기하거나, 혹은 재능이 따라주지 못해 자의 반 타의반으로 어쩔 수 없이 현실에 안주하면서 꿈에 대한 아쉬움으로 인해 스스로에 대한 경멸, 연민, 좌절 등을 통해 뒤틀려가는 심리를 세밀하게 보여준다. 벤 역시 마찬가지다. 소설 초반부에 벤은 변호사로서 안정적인 궤도에 올라선 뒤, 작가를 꿈꾸는 아내에게 직장을 관두고 집에서 편하게 글을 쓰기를 권했던 일을 '바보 같은 실수'라고 한다. 그리고 그 한편으로 고백한다. "그도 아니면 아내가 그냥 집에 처박혀 실패하기를 바랐는지도. 실패를 경험한 사람은 주변 사람도 같이 실패하기를 바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