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charted

빨리 나가는 게 답이다

kirindari 2018. 11. 8. 15:02

#1. 


(작년까지만 해도) 병원에서 사라졌을 타이밍이건만, 주 80시간의 여파의 불똥이 애꿎은 4년차로 튀었다. 작년만해도 없던 턴을 만드느라 난리 아닌 난리를 치고, 사다리를 돌리다보니 이미 돌았던 턴이 다시 걸렸는데 하필 유일하게 일을 시키는(?) 과라 우거지상을 하고 간헐적 출근을 하고 있다. 하긴 지난 달 초에 주말밤에 응급수술이 잡혀 밤 10시에도 병원에 갖혀있던 타과 동기를 생각하면 양반이려니 해야지 싶다. 집에만 있느니 나가는 게 좋은 거다라고도 생각하고 있고. 


#2. 

내가 주치의를 하던 때만 해도(이렇게 쓰면 까마득한 옛날 타령하는 꼰대 같지만 고작 2-3년 전) 주 몇 시간 근무는 의미가 없었다. 주치의면 으레 주말이고 휴일이고 나와서 환자를 보는 게 당연한 분위기였고, 환자가 안 좋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오프를 자진 반납하고 환자를 보고 밤을 샜었다. 그 와중에도 병원 자체 규정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EMR상 입력 가능한 당직 일수가 제한이 걸려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더 일을 많이 하고도 돈을 못 받기도 했지만, 힘들면서도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고, 돈을 못 받거나 덜 쉬는 거에도 사실 큰 불만은 없었다. 저년차 때는 당직 때 밤이라도 새는 날이면 다음 날 과로사가 왜 생기는지 체감했지만 그래도 2-3년만 참으면 나아지겠지라는 기대로라도 그럭저럭 유지되던 시스템은 모두가 공평하게 연차에 상관없이 최대 주 80시간 일해라가 되면서 없던 불만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이 시스템의 희생양은 지금의 3,4년차이고, 그 연차들 입장에서야 불만을 갖지 않을 수는 없다. 솔직히 안 억울하겠는가? 과도기에 끼었으니 어쩔 수 없지라고 자위해봐도 저년차 때 일은 일대로 다 해놓고, 주 80시간이 되면서 저년차 때 했던 일들이 위로 올라와버린 거니 연차가 올라간 것이 체감상으로 와닿지 않는 상황이 된 거다. 사실 병원 입장에서는 더 좋을 것이다. 제한된 당직시간으로 당직비의 한계는 정해져있고, 신규보다는 경험이 있는 사람들(그래봤자 경력이라고 돈을 더 많이 받지도 않는)이 일을 하나 더 좋겠지. 사람 많은 내과는 돌려막기라도 되지만 연차당 티오가 1,2명인 마이너 과 동기들이 연휴고 주말이고 못 나가고 병원 안에 잡혀있는 걸 보면 애잔할 지경이다. 


#3. 

많을 때는 혼자서 환자 50명 가까이를 봤다. 밤샘당직이라도 선 다음 날 아침은 최악이었다. 늦어도 오전 7시부터 스테이션에 앉아 회진 전까지 환자를 파악해야한다. 환자가 20명이 넘고, 매일 랩이라도 하는 과 같은 경우는 환자 챠트를 모두 열어보고 파악하는 데만 아무리 빨리 해도 1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 와중에 밤새 있었던 온갖 이벤트며 내 출근과 동시에 열이 난 환자 노티가 사방에서 온다. 봤던 환자를 다시 본다. 다른 환자들은 언제 다 보나. 정말 별 거 없는데, 바쁜 시간에 면담 요청하는 환자/보호자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솔직히 짜증부터 난다. 시간 내서 면담하면 다음 날은 처음 보는 보호자가 와서 또 설명해달라고 한다. 그 와중에 퇴원하는 환자는 빨리 퇴원 시켜달라 그러고, 퇴원 처리 되고 나면 다시 올라와서 이 약은 집에 있는데 왜 또 줬냐 이건 더 줘라....그 와중에 안 좋은 환자 발생하면 모든 일이 밀리고 일정이 꼬여버린다. 그런 날은 차라리 당직이 마음이 편하다. 이런 온갖 자잘한 경험이 요령이 되어 시간이 흐르면서 퇴원예정인 환자는 전날 미리 처방도 내고, 집에 갖고 갈 약도 미리 파악해서 맞춰서 내 놓고 하지만 사람의 일이라 늘 변수는 있는 법이다. 주치의는 늘 괴롭고 피곤하고 표정이 썩어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해보면 주 80시간은 꽤 좋은 제도다. 강제로라도 휴식시간을 마련하니까 차라리 사람이 덜 치이거든. 생각해보니 주치의 하면서 아침은 당연히 못 먹는 거고 점심도 제대로 먹어본 기억이 없다.  밥 먹을 시간에 차라리 잠깐이라도 자는 걸 선택했다. 몸도 힘든데 사사로운 감정까지 소모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정말 죽을 것 같았으니까. 환자가 좋아져서 퇴원하는 것, 라운딩 돌 때마다 웃으며 반갑게 맞아주는 게 그나마 유일한 보람이었다. 



#4. 

얼마 전 이대병원 신생아중환자실 사건 이후로는 주치의를 고년차로 올리라는 말까지 나왔다. 1,2년차 때 주치의를 해봐야 3년차 때 뭘 알지, 뭐든 잘 하고 많이 알 거 같은 3,4년차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줄 아나보다. 내가 2년차 때 중환자실 처음 들어갔을 때는 꼬박 2주를 집에 못 가고 새우잠을 잤다. 그래도 그러려니 했다. 120시간을 일할 때도 별 말이 없다가 갑자기 주 80시간만 일하라 그러고, 어길시에는 전공의 티오를 줄인다느니 병원장이 실형을 살게 된다느니 별별 말이 다 나온다. 그 와중에 임신한 경우는 주 40시간 일하고, 모자란 트레이닝 기간은 추가 근무로 더해진다. 졸지에 임신한 전공의는 본인 경력도 꼬이고, 본의 아니게 동기들한테도 민폐를 주게 된다. 출산 장려 같은 소리하고 있네. 나도 여자지만 내가 병원장이나 해당과 과장이면 전공의 하겠다고 찾아온 지원자들 중에서 굳이 임신 가능성 있는 여자 전공의는 안 뽑고 싶을 거다. 그 와중에 누가 사표라도 내고 나가버리면 그건 누가 하나? 애초에 티오가 안 차서 사람이 모자란 곳은? 거기서 또 나가면 그 일들은 누가 하라는 건지. 그렇다고 더 일하는 사람에게 봉급이 더 오르지는 않는다. 

  

얼마 전 단체창에 우리 병원도 12월부터 근무시간이 지나면 EMR에서 강제로 로그아웃이 된다는 공지가 떴다. 어느 과든 마찬가지겠지만 내과처럼 바이탈을 다루는 과에서는 환자가 갑자기 안 좋아지면 환자 하나를 살피는 데만도 2-3시간은 순식간에 지난다. 당직 때 중환이라도 한명 나오면(1명만 나오면 그나마 다행) 밤 새는 일도 허다하고. 그런데 난 오늘 오프고, 내일 처방은 다 못 냈는데 퇴근 1시간 전에 환자가 cpr이라도 났다.  환자 정리되고 나면 퇴근 시간은 이미 지났는데 전자챠트에 접속도 못 하고, 하던 중에 로그아웃을 하게 해 버리면 어쩌라는 건가? 대리처방이라도 하라는 건지. 시스템에 대한 이해 없이 제도부터 만들면 결국 웃기는 모양새가 된다. 물론 그 전의 시스템도 정상은 아니다. 애초에 사람을 갈아서 유지해오던 시스템이니. 온갖 규제가 허술함에 비례해서 늘어난다.  

 



#5. 


주치의를 벗어나고 나서야 아이러니하게도 환자를 객관적으로, 그리고 좀 더 인간적으로 보게 되었다. (물론 이건 지극히 내 개인적인 이야기이고,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3년차가 되서 가장 신기했던 것 중 하나가 환자를 보는 폭이 넓어지는 것이 실제적으로 느껴졌다는 것이다. 주치의라고 오히려 환자에게 부대끼고 매달려있던 그 순간들이 회진일지를 뽑으며 그날 해야할 일 리스트 이상으로 보기 어려웠던 걸 이제서라도 고백한다. 의사도 사람이다. 마음 같아서는 환자 하나하나 손 잡아주고 이야기 들어주고 싶고 안아주고 싶지. 그런데 그것도 결국 의사가 심리적, 신체적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한 발 물러서니 환자의 가족도 객관적으로 보게 되더라. 주치의 때의 심리적 압박과는 아예 느낌이 다르다. 정말 사람으로 와 닿는 느낌. 내가 문제인가 고민도 해보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시 주치의를 하고 밤샘 당직을 견딜 자신이 없다. 이런 시스템에서 인류애를 평생 유지하는 건 말도 안 된다. 환자들도 그런 환상 갖지 말고, 의사들도 그렇지 못한 자신에 대해 자괴감 갖지 않았으면. 한국의학드라마 망해라. 그리고 심평원도 망해라.